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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

병자호란 굴욕을 지켜본 남한산성 느티나무

by 보호수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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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화문과 느티나무@보호수

 

1636년 12월, 청나라는 1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청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넌지 며칠 만에 한성 가까이 들이닥쳤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했었다. 하지만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야 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한겨울의 찬바람을 맞아가며 남문(지화문)을 통해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군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47일 만에 항복을 하고 만다. 1637년 1월 30일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이른 아침 인조는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정문인 남문 대신에 서문을 빠져나와 청 태종의 지휘 본부가 있던 한강 삼전도(삼전나루,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지역)로 향했다. 그날의 비참했던 현장의 모습을 1637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고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함께 창(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 이하가 강화도에서 잡혀 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그 비참한 역사를 목격한 나무가 바로 남한산성 정문인 남문 앞에 있는 느티나무다. 수령 470년으로 추산하는 이 느티나무는 남한산성이 준공된 인조 4년(1626년) 때 당시 성곽사면 토양유실 방지 및 차폐의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보인다. 풍치목(風致木)이다.

느티나무@보호수


수종 : 느티나무

수령 : 450년(지정일자 기준)

수고 : 17m

나무둘레 : 1.45m(가슴높이)

지정일자 : 2006. 6. 20.

지정번호 : 경기-성남-21

소재지 : 은행동 산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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